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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세이6

[사이의 시간들 8] 나도 내 마음을 다 알 수 없어서 몸이 점차 회복된다고 해서, 마음까지 덩달아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편해졌다고 느꼈던 마음도 너울성 파도처럼 예측할 수 없이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곤 했다. 재활치료를 하며 새로운 동작을 시도할 땐 잠깐의 기쁨이 스쳤다가,곧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낙심하게 된다. 재미있는 영상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다가도,자세를 고쳐보려 움직이는 순간 옆으로 기울어져 다시 몸을 일으키지 못하면 울컥한다. 나와 같은 병명을 가진 환자가 있었다는 소식에 잠시 희망을 품다가,그 환자는 빠르게 회복해 뛰어서 퇴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내 현실에 주저앉는다. 그래도 회복 속도가 빠르다는 선생님들의 말에 웃어보지만,그 동작 하나를 해내기까지 한 달 반이 걸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괴감이 밀려온다. 가끔 다른 보호자들이 건네는.. 2025. 7. 5.
[사이의 시간들 5] 하루의 전부였던 30분 중환자실 면회시간은 하루 단 한 번, 30분이었다.새벽에 눈을 뜨면 그때부터 면회시간만 기다렸다.내 자리에서 멀리 있는 시계를 간신히 보며, 한 시간, 삼십 분, 십 분…숫자를 마음속으로 셈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혹시 오다가 사고라도 났을까,일이 생겨서 못 오는 건 아닐까,오늘 오면 어디를 만져달라고 말해야 할까.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엄마가 오기만을 바랐다. “면회 준비하겠습니다.”간호사가 앞치마와 장갑, 면회 리스트를 들고 중환자실 밖으로 나가면5분만 참으면 엄마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렜다.“면회 시작하겠습니다.”간호사의 말이 들리면 보호자들이 하나둘 중환자실로 들어왔고,엄마는 항상 가장 먼저, 혹은 두 번째로 나를 찾아왔다. 늘 웃는 얼굴로 내 얼굴을 살피며 어제는 괜찮았냐고 물어봤다.몸 상.. 2025. 6. 14.
[사이의 시간들 4] 오른발로 쓴 첫 문장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열흘쯤 됐을 때, 나는 오른쪽 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발목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리를 아주 살짝 들 수 있었기 때문에허공에 대고 다리를 움직이며 한글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그리는 방식으로 단어를 써내려갔다. 입엔 인공호흡기가 있었다.그 전까지는 의사소통이 정말 힘들었다.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간호사들과는 일종의 스무고개 같은 눈치게임이 시작됐다.어느 날은 소통이 너무 어려우니까, 간호사가 종이에 자음과 모음을 써왔다.그걸 펜으로 가리키면 나는 눈을 꿈뻑이거나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했다. 그러다 오른발로 직접 글씨를 쓰게 됐다.처음엔 누구도 내 글씨를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며칠이 지나고 하나둘 맞추기 시작하자 대화가 조금씩 쉬워지기 시작했다.그 무렵부터, 오른쪽 다리에 힘이 .. 2025. 6. 7.
[사이의 시간들 3] 말할 수 없던 밤, 잊혀지지 않는 말 그날 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인공호흡기 자발호흡 훈련 중이었고, 호흡은 여전히 버거웠다.몸의 각도 하나, 가래의 양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기, 나는 그날도 조심스럽게 간호사가 바쁘지 않기를 기다려 석션을 요청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세가 더 불편해졌고,숨쉬는 것이 고통이 되었다. 결국 나는 침대 난간을 다리로 쳐서 간신히 도움을 요청했다.그렇게 간호사가 다가왔고,그때 들은 말은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박혀 있다. “자야 되는데, 말을 해야 알죠. 말을.” 숨을 쉴 수 없어 불렀고,말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찾은 밤이었다.그 말은 너무 쉽게 나를 무너뜨렸다.그날 밤 이후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많은 시간이 흘렀지만,이상하리만큼 그 한 마디는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른다. 억울.. 2025. 5. 31.
[사이의 시간들 2] 처음, 울음이 터진 날 중환자실에 들어가자마자 인공호흡기를 달았다.그곳에 적응하느라 일주일 정도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그저 빨리 호전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인공호흡기를 언제 뗄 수 있을지,몸이 언제 움직일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매일 천장만 바라보며엄마가 오는 면회 시간만 기다렸다.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오늘 날씨는 어떤지—그저 바깥이 궁금했다. 그래서 어느 날, 간호사에게 라디오를 부탁했다.기계음만 가득하던 공간에, 라디오가 처음 흘러나왔을 때효리 언니의 담담한 목소리가 나를 무너뜨렸다. 노래가 흐르는 순간, 눈물이 났다.아무런 예고도 없이,억울하다는 감정이 밀려왔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겨우 숨 쉬고 있는 내 몸,움직일 수조차 없는 이 현실,그저 침대에 눕.. 2025. 5. 24.
[사이의 시간들 1] 그날, 끝에서 바라본 것들 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무방비한 채로 맞이한 그 순간, 나는 그대로 무너졌다. 또렷한 정신으로 한 달 반을 버틴 중환자실.그곳은 내 감정과 생각을 바닥 깊은 곳까지 끌어내리는 장소였다. 처음 누군가의 죽어가는 소리를 들은 날,‘여기가 나의 끝일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고처음 누군가의 관이 나가는 모습을 봤을 땐그분의 평안을 빌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다 어느 날,내 숨이 멈춰져 가는 걸 스스로 느낀 순간이 있었다.의식이 흐릿해지고, 끝까지 숨 쉬려 애쓰다너무 힘들어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질 무렵—눈앞에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 해보지 못한 일들,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사람들,그리워만 했던 풍경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억울했다.이대로 끝이라는 게, 정말 억울했다. 그때의 감각은 지금도 또렷하.. 2025.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