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시간들8 [사이의 시간들 9] 처음으로 내 힘으로 앉은 날 처음으로 침대에 기대지 않고, 내 힘으로 스스로를 지탱한 채 침대에 걸터앉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몸이 무너지고 침상 생활을 시작한 지 65일 만이었다. 재활치료도 병실 안에서만 받던 시기였고, 움직이지 못해 누운 채 스트레칭과 간단한 다리 운동만 하던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작고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활기찬 치료사 선생님이었다.아마 두 번째 만나는 날이었을 텐데, 그 선생님은 "안 해본 걸 한번 해보자"며 나를 믿으라고 말했다."할 수 있어요. 저만 믿고 한번 앉아볼까요?" 누워서만 치료를 받던 나에게 "앉아보자"는 말은 놀랍고도 기쁜 제안이었다.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시도해볼 수 있다는 설렘이 훨씬 더 컸다.침대의 등받이를 세워도 상체에 힘을 주지.. 2025. 7. 13. [사이의 시간들 8] 나도 내 마음을 다 알 수 없어서 몸이 점차 회복된다고 해서, 마음까지 덩달아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편해졌다고 느꼈던 마음도 너울성 파도처럼 예측할 수 없이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곤 했다. 재활치료를 하며 새로운 동작을 시도할 땐 잠깐의 기쁨이 스쳤다가,곧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낙심하게 된다. 재미있는 영상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다가도,자세를 고쳐보려 움직이는 순간 옆으로 기울어져 다시 몸을 일으키지 못하면 울컥한다. 나와 같은 병명을 가진 환자가 있었다는 소식에 잠시 희망을 품다가,그 환자는 빠르게 회복해 뛰어서 퇴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내 현실에 주저앉는다. 그래도 회복 속도가 빠르다는 선생님들의 말에 웃어보지만,그 동작 하나를 해내기까지 한 달 반이 걸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괴감이 밀려온다. 가끔 다른 보호자들이 건네는.. 2025. 7. 5. [사이의 시간들 7]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려고 병명을 모를 땐 그저 무서웠다.몸은 점점 처져가는데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함과 무서움이 가득했다. 병명을 듣고,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땐 막막했다.원인도 없고, 희귀병이며, 치료 가능한 약도 없고, 숨을 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그저 어이가 없었다.현실감각은 이미 저 땅속 아래로 꺼져버린 듯했다. 결국 인공호흡기를 달고,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중환자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땐 화가 났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며 산 적도 없고,내 손으로, 내 힘으로 하고 싶은 일 좀 해보겠다고밤낮을 쪼개가며 머리 싸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죄밖에 없는데.세상천지에 나쁜놈들은 수두룩한데, 왜 하필 나냐고.몇 날 며.. 2025. 6. 28. [사이의 시간들 6] 처음, 웃음이 터진 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중환자실의 생활은 기다림과 인내의 연속이었다.면회시간을 기다리고, 간호사가 틈이 날 시간을 기다리고,포지션 선생님이 와서 몸을 돌려줄 시간을 기다리고,밤이 와서 수면 주사를 맞기를 기다리고,호흡이 돌아오길, 몸이 돌아오길,중환자실에서 나갈 수 있기를 인내하며그저 하루하루를 버텼다. 라디오도 지겨워질 즈음,평소 좋아하던 노래들이 너무 듣고 싶어졌다.엄마에게 부탁해 동생에게 전해달라고 했다.CD플레이어와, 세븐틴 노래를 잔뜩 담은 USB를. 이틀 뒤,비싸 보이는 CD플레이어와 함께엄마는 동생이 보낸 USB를 중환자실에 넣어주고 갔다.동생의 취향이 반영된 아이유 노래와내가 부탁한 세븐틴 노래가 가득한 USB였다. 이브닝 간호사가 노래를 틀어줬고,그 순간 흘러나온 첫 곡은 세븐틴의 ‘Shin.. 2025. 6. 21. [사이의 시간들 4] 오른발로 쓴 첫 문장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열흘쯤 됐을 때, 나는 오른쪽 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발목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리를 아주 살짝 들 수 있었기 때문에허공에 대고 다리를 움직이며 한글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그리는 방식으로 단어를 써내려갔다. 입엔 인공호흡기가 있었다.그 전까지는 의사소통이 정말 힘들었다.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간호사들과는 일종의 스무고개 같은 눈치게임이 시작됐다.어느 날은 소통이 너무 어려우니까, 간호사가 종이에 자음과 모음을 써왔다.그걸 펜으로 가리키면 나는 눈을 꿈뻑이거나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했다. 그러다 오른발로 직접 글씨를 쓰게 됐다.처음엔 누구도 내 글씨를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며칠이 지나고 하나둘 맞추기 시작하자 대화가 조금씩 쉬워지기 시작했다.그 무렵부터, 오른쪽 다리에 힘이 .. 2025. 6. 7. [사이의 시간들 3] 말할 수 없던 밤, 잊혀지지 않는 말 그날 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인공호흡기 자발호흡 훈련 중이었고, 호흡은 여전히 버거웠다.몸의 각도 하나, 가래의 양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기, 나는 그날도 조심스럽게 간호사가 바쁘지 않기를 기다려 석션을 요청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세가 더 불편해졌고,숨쉬는 것이 고통이 되었다. 결국 나는 침대 난간을 다리로 쳐서 간신히 도움을 요청했다.그렇게 간호사가 다가왔고,그때 들은 말은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박혀 있다. “자야 되는데, 말을 해야 알죠. 말을.” 숨을 쉴 수 없어 불렀고,말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찾은 밤이었다.그 말은 너무 쉽게 나를 무너뜨렸다.그날 밤 이후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많은 시간이 흘렀지만,이상하리만큼 그 한 마디는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른다. 억울.. 2025. 5. 31. 이전 1 2 다음